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바비 무어 (문단 편집) == 여담 == || [[파일:tubbyandfatso.jpg|width=100%]] || >진행자: 당신의 신체적 특징 때문에 어떤 별명이 생겼다고 하는데, 그게 무엇이었는지 기억하시나요? >바비 무어: 여기서 말해도 될까요? >진행자: 네. >바비 무어: 오, 감히 말해도 되나요?(Oh, Dare I?) >진행자: 하하하, 네. >바비 무어: 느림보요.(Tubby.) >진행자: 느림보요? >바비 무어: 느려터진 뚱보요.(Tubby and Fatso.) >진행자: 느려터진 뚱보였군요.(Tubby and Fatso, yes.) >(객석 웃음) >[[https://www.youtube.com/watch?v=NUx6rng3V48|출처]] 바킹에 살던 어린 시절, 무어의 별명은 Tubby 그리고 Fatso, 즉 '느림보', '뚱보'였다. 위 사진의 검은 동그라미 속에 있는 통통한 소년이 무어이다. 어렸을 때에는 키에 비해서 상당히 비대한 체구를 가지고 있었지만, 나이가 들며 살이 엄청나게 빠져서 아주 깔끔한 외모의 미남이 되었다. 무어가 본격적으로 1군 팀에 데뷔하기 전 가장 존경했던 선수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던컨 에드워즈]]이다. 던컨 에드워즈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발롱도르 3위에 올랐을 정도로 이름을 날렸던 잉글랜드 최고의 기대주였다. 웨스트햄 팀 내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믿고 따랐던 선수는 말콤 앨리슨이었다. 이 선수의 포지션도 던컨 에드워즈와 마찬가지로 레프트 하프였다. 그래서 무어는 에드워즈, 앨리슨의 등번호였던 6번을 달고 뛰고 싶어했다. 1957년에 말콤 앨리슨이 [[결핵]]으로 인해 커리어를 중단하게 되면서, 무어는 1958-59시즌 1군에 데뷔하자마자 6번을 자신의 등번호로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무어는 존경하던 던컨 에드워즈와 같은 등번호를 달고 함께 경기하는 영광을 누리지는 못했다. [[뮌헨 비행기 참사|에드워즈는 무어가 1군에 데뷔하기 8개월 전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qhMGXG8aTBs|출처]]] || [[파일:BobbyMooreWithTheEquals.jpg|width=100%]][br][youtube(m3rhWV-y-qY, width=100%)] || 1969년 런던 레코딩 스튜디오에서 브릿팝 그룹인 [[https://en.wikipedia.org/wiki/The_Equals|디 이퀄스]]와 만나서 그들의 히트곡인 [[https://www.youtube.com/watch?v=veVRejxrE6U|Viva Bobby Joe]]를 Viva Bobby Moore로 개사하여 부르는 신선한 작업을 하기도 했는데, 이 녹음본은 유실되었다. 대신, 록 그룹 더 비지니스가 2006년에 Viva Bobby Moore를 다시 녹음하여 대중에 공개했다. || [[파일:BobbyMooreSavePenalty.gif|width=100%]] || 부상당한 골키퍼 대신 골대에 섰다가 [[페널티 킥]]을 막아낸 특이한 경력이 있다. 당시의 자세한 상황은 [[바비 무어/클럽 경력#s-2.14]]참고. || [[파일:BobbyMooreandFranzBeckenbauer1.jpg|width=100%]][br][[파일:BobbyMooreandFranzBeckenbauer2.jpg|width=50%]][[파일:BobbyMooreandFranzBeckenbauerFamily.jpg|width=50%]] || 메이저 국가대항전에서 매 번 만났고, 만날 때마다 명경기를 연출해냈던 서독의 [[프란츠 베켄바워]]와는 사적으로도 가까운 사이였다. 서독 국가대표팀이 유로 1972 플레이오프를 위해 잉글랜드에 방문해 있었을 때, 베켄바워의 가족이 무어의 집에 놀러 오기도 했다. 둘은 체스 게임을 하고 사진을 찍는 등 우정을 나누었다. 위 사진들은 전설적인 사진작가 [[https://en.wikipedia.org/wiki/Terry_O%27Neill_(photographer)|테리 오닐]]이 그때 직접 무어의 집을 방문하여 찍은 사진들이다. 베켄바워는 저 때 무어와 함께한 체스 게임의 결과는 어떻게 되었냐는 기자의 질문에 미소를 띄워 보이며 "기억나지 않는다"라고 말하기도 했다.[[https://www.dailymail.co.uk/sport/football/article-3715273/We-lost-beautiful-hear-final-whistle-d-mark-Bobby-Charlton-two-hours-Franz-Beckenbauer-talks-goal-England-deserved-win-1966-World-Cup.html|#]] 베켄바워는 [[바비 찰튼]]과도 매우 가까운 관계이다. 여러 모로 [[암]]과 관련이 많은 인물이다. 1964년 말, 20대 초반의 나이에 [[고환암]] 진단을 받았으나 5년에 걸친 꾸준한 노력 끝에 결국 완치에 성공한 인간승리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당시 언론에 대놓고 공개하지는 않았지만 무어와 가까운 지인들은 모두 그가 고환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다만 국내에는 [[대장암]]으로 사망했다는 사실 정도가 알려져 있을 뿐, 고환암을 앓았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본인의 의도였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사후 부인인 스테파니 무어가 바비의 유산으로 영국 암연구회와 협력하여 바비 무어 기금을 설립했다. 현재 이 기금은 꽤 많은 수의 암 환자들을 돕고 있다. [[발렌타인 데이]]와도 관련이 깊다. 1973년 2월 14일 자신의 100번째 A매치를 진행했고, 1993년 2월 14일에는 대장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대중에 공개했다. 물론 후자의 경우 본인이 의도한 바는 아니었다. 첫 번째 아내인 티나 무어, 동료 제프 허스트 등의 말에 따르면, 타인에게는 매우 관대하나 본인에게 상당히 엄격한 [[완벽주의자]]였다. 티나와 이혼했을 때도 이 성격이 큰 영향을 미쳤고, 평생 지낼 것 같았던 웨스트햄에서 떠난 것도 이런 이유가 컸다. 본인이 부상으로 빠져 있을 때 팀의 성적이 더 좋아지자, 그냥 바로 풀럼으로 떠나버렸다. 국가대표팀에서도 충분히 더 뛸 수 있었지만 32세에 은퇴했는데, 이 역시 1974년 월드컵 유럽 예선 폴란드전에서의 실수가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실수의 자세한 내막이 궁금하다면 [[바비 무어/국가대표 경력]] 참고 바람. >"그는 완벽한 사람이었다. 그는 라인에 맞춰서 모든 옷을 정리해 놓았고, 그의 시계는 안방 진열장에 완벽히 정렬되어 있었으며 모든 것이 표준적으로 설치되어 있었다. 그는 가장 환상적인 룸메이트인데, 그와 함께라면 어느 물건도 제자리에서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중략) 그는 티끌 하나 없이 깔끔했다." >---- >[[지미 그리브스]] 함께 월드컵 우승을 경험했던 [[지미 그리브스]]는 무어를 위와 같이 서술했다. 생활 습관 자체가 상당히 깔끔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재미없는 성격은 아니었고, 유머러스한 장난도 칠 줄 알았다. >"그가 경기 전 잉글랜드 선수들을 FA 관계자들에게 한 명 한 명 소개할 때, 엉뚱한 이름으로 소개할 때가 많았다. "여기는 레이 윌슨, 여기는 조지 코헨..." '''그리고 내 차례가 왔을 때, 그는 뜬금없이 나를 '로저'라고 소개했다. 내가 의아해하는 표정을 짓자, 그는 나에게 [[윙크]] 사인을 보내고 "여기는 로저 헌트입니다"라고 뻔뻔하게 거짓말을 쳤다. 그런데 그들은 그게 거짓말인지 몰랐다. 그들은 FA의 고위 관리들이었고 선수들을 전혀 몰랐던 것이다. 어쨌든, 무로(별명)는 낯빛을 전혀 바꾸지 않은 채로 그런 장난을 치곤 했다.''' 바비는 내가 아는 어떤 선수보다도 나를 더 곤경에 처하게 만들었다. 그는 악당이었다." >---- >[[지미 그리브스]] || [[파일:Bobby'sfamily.jpg|width=100%]] || 위 사진은 첫 번째 아내인 티나 무어, 그리고 둘 사이에서 태어난 딸 로버타와 아들 딘을 담은 사진이다. 상당히 가정적인 성향이 강했다. 티나는 바비가 결혼생활에 충실했던 덕에 결혼생활 내내 '보호받는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또한 바비가 바람을 피운다는 말과 비슷한 말조차도 들어본 적이 없으며, 자신 대신에 다른 여자를 만나는 것은 상상도 못 해봤다고 한다. 결국 여러 가지 문제가 겹쳐 1986년에 이혼하긴 했지만, 외도 때문은 아니었다. 이런 성격을 가지고 있어서인지 선수생활 내내 사생활 문제를 일으킨 적이 없다. 1970년 월드컵 직전, 바비 찰튼과 함께 보고타 호텔 근처의 귀금속 상점에서 금팔찌를 훔쳤다는 죄목으로 고소를 당한 적도 있으나, 이 역시도 둘 다 완벽하게 무죄인 것으로 밝혀졌다. 생전에 [[마가렛 대처]]를 공개적으로 지지하기도 했다.[[https://www.pinterest.co.kr/pin/532480355924028726/|함께 있는 사진]][[https://www.birminghammail.co.uk/news/local-news/the-celebrity-friends-of-margaret-thatcher-245512|#]] || [[파일:afterretirementbobbyinhispubnamedthethreehorseshoes.jpg|width=100%]] || 런던에서 유명한 [[애주가]]였다. 알코올에 중독된 적은 없지만, 시간이 날 때마다 술을 마셨다고 한다. [[펍]] 특유의 분위기를 상당히 좋아해서, 한창 축구 선수로 뛰던 시절에도 아내 티나와 함께 웨스트햄 홈구장 업튼 파크 근처에 주점을 차려 운영하기도 했다. 위 사진은 은퇴 후에 운영한 'The Three Horse Shoes'라는 주점에서 찍은 사진이다. >"그는 젊은 시절의 밤을 아주 좋아했다. 뛰기 위해 마시고 마시기 위해 뛰었다. 그게 그의 방식이었다. 훈련할 때에는 [[악바리]]였다. 때때로 그는 토요일 밤을 샌 후 일요일 아침에 저녁 정장을 입고 경기장에 나타나곤 했다. 그는 일요일에 트랙수트, 빈 다이너, 검은색 가방을 착용하고 운동장 12바퀴 정도를 돌았다. 그는 누구보다도 열심히 훈련하며 땀을 뺐다. 누군가가 그에게 열한 시 정도가 되었다고 말해 주면, 그는 경기장 밖으로 나가서 옷을 단정히 입고, 펍에 갔다." >---- >[[프랭크 램파드 시니어]]&[[해리 레드냅]]&[[제프 허스트]]&롭 젠킨스, Bobby 다큐멘터리에서 1970년까지는 술이 문제가 된 적이 없었지만, 1970-71 시즌에 대형 사고를 친 적이 있다. 당시 웨스트햄은 1월 첫째 주의 FA컵 경기를 앞두고 있었는데, 무어는 경기 전날 그라운드에 [[서리(날씨)|서리]]가 생겨 FA컵 경기가 연기된 것으로 알고 팀 동료 [[지미 그리브스]], 클라이드 베스트, 브라이언 디어와 함께 술을 무리하게 마셨다. 그러나 경기는 그대로 진행되었고, 무어는 최악의 활약을 보여주며 리그 최하위 [[블랙풀 FC|블랙풀]]을 상대로 패하여 탈락하고 말았다. 이후 은퇴할 때까지 무리하게 술을 마셔 사고를 치는 일은 없었다. 다만 술을 굉장히 좋아하는 이런 습관이 무어의 [[대장암]]에 좋지 않은 영향을 주었을 수도 있다. 생전에 옷을 깔끔하게 잘 입는 것으로 유명했다. 소위 말하는 '조각 미남'은 아니었지만, 좋은 스타일링으로 준수한 외모를 잘 살렸다. 이런 점에 국가대표팀의 주장인 점까지 보너스 요인으로 작용하여, 월드컵 우승 직후 영국에서 손꼽히는 대스타가 되었다. 축구선수 중에서는 그야말로 독보적인 인기를 자랑했다. 무어의 이런 범국민적인 인기는 [[조지 베스트]]가 이어받게 된다. 해설위원으로 활동한 기간은 3년 정도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짧고 그마저도 TV가 아닌 라디오 해설위원으로만 활동했지만, 조너선 피어스, 존 모트슨 등 그와 함께했던 사람들은 바비가 그 짧은 기간 동안 얼마나 많은 미담을 만들어냈는지 증언하고 있다. >"바비는 내가 만류해도 직접 운전하기를 고집했다. 스테파니가 말해 주었는데, 바비가 운전을 고집하는 것은 그가 경기장에서 내가 대부분의 일을 한다고 생각하므로 오고 가는 동안은 자신이 모든 일을 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바비는 거친 운전을 즐겼다. 사람들은 경적을 울리고 창문을 쿵쾅거리다가도 운전자가 바비인 것을 확인하고 나서는 태도가 싹 변했다. "바비 무어?", "바비 무어다!", "바비 무어가 방금 우리 차를 추월했어!" 모두가 바비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교통체증이 조금 풀리면, 그들은 다시 옆으로 와서 창문을 열고 바비에게 사인을 요청했다.[* Bobby would insist on driving. Stephanie told me it's because Bobby thought that I did all the work at the ground and therefore he would do all the work in getting there and getting back. Bob would cut off everyone. And did the people banging their horns and thumping their windows and then they'd see it was Bobby and go, you know, "Bobby Moore? Bobby Moore!!", "Bobby Moore has just cut us up." Everyone waving for Bobby, then stop at a traffic jam a bit further up the car that he'd just cut up would want his autograph. 2016년의 [[BBC]] 특별 다큐멘터리 Bobby에서.] >---- >조너선 피어스 >"또 하나의 놀라운 일화는 [[UEFA 유로 1992]]때 있었다. 줄리안 워터스라는 청년 기자가 나와 함께 월드컵을 취재하러 왔는데, 그는 토너먼트가 완전히 끝날 때까지 그곳에 머무르고 싶어했다. 잉글랜드는 조별 리그에서 탈락했고, 캐피털 라디오 측에서는 예산이 없어서 우리 팀이 모두 돌아와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줄리안은 슬퍼했다. 그때, 바비 무어가 나를 한쪽으로 끌어당기며 작게 이야기했다. '''"줄리안의 임금과 남은 대회 기간 동안 머물 경비를 내가 마련할게. 단, 줄리안이 이 사실을 모르는 한."''' 바비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친절했다....(중략)... 그는 왕자와 거지를 똑같이 대하는 훌륭한 신사였다." >---- >조너선 피어스 >"내가 바비 무어를 실제로 처음 만난 것은 내가 BBC 프로그램 스포츠나이트의 첫 주에 해설 일을 하던 때였고, 그것은 내가 기억하는 가장 추운 밤 중 하나인 아이레솜 파크에서 열린 미들즈브러와 풀럼 사이의 앵글로-스코티쉬 컵 결승전이었다! 나는 경기가 끝난 후 벌벌 떨며 바깥을 배회하고 있었는데, 풀럼 탈의실 문이 열렸고 그 자리에 서 있는 사람은 바비 무어였다. 그는 '추워 보인다. 안으로 들어와!'라며 나를 불렀다. 그것은 아주 친절한 남자의 아주 멋진 행동이었다. 그는 그가 하는 모든 일에서 너무나 겸손한 태도를 보여주었고, 나는 그에게 보살핌을 받았던 그 저녁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정말로....(중략)... EFL 트로피[* EFL 컵이 1부 리그와 2부 리그 팀들 간에 진행되는 대회라면, EFL 트로피는 3부 리그와 4부 리그 팀들 간에 진행되는 대회이다] 대회가 열렸을 때도 나는 그를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바비는 그때에도 변함없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첫째, 바비는 한 무더기의 유니폼을 직접 들고 와서 마치 그가 키트 관리인인 것처럼 모든 선수들에게 유니폼을 직접 나누어 주었다. 그것은 그가 가진 겸손함의 또 다른 예였다....(중략)... 바비 무어와 그의 부인 스테파니가 없었다면, 나는 지금 당신과 이렇게 인터뷰하고 있을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스테파니가 바비의 유산으로 설립한 '바비 무어 기금' 덕분에 대장암에 걸렸음에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 >존 모트슨 1978년에 아르헨티나의 [[다니엘 파사레야]]가 경신하기 전까지 역대 최연소 월드컵 우승팀 캡틴이었다. 우승 당시 나이는 25세 109일. || [[파일:BobbyMooreWithGranddaughter.jpg|width=100%]] || 1991년 4월, 바비 무어의 아들 딘 무어가 '[[https://www.mirror.co.uk/3am/celebrity-news/bobby-moores-granddaughter-ties-knot-5502129|포피]]'라는 이름의 딸을 낳았다. 바비는 세상을 떠나기 전에 손녀를 얻으며 할아버지가 되었다. 바비 무어는 51세까지 살았고, 바비의 아들 딘 무어는 2011년 43세의 나이에 [[자연사|별다른 이유 없이 세상을 떠났다]]. 부자가 모두 [[단명]]했다. 딘의 어머니이면서 첫 번째 아내인 티나 무어, 그리고 딸 로버타 무어는 현재 살아있다. || [[파일:BobbyMooreStatue.jpg|width=100%]] || 1923년부터 80년간 존속된 올드 [[웸블리 스타디움]]을 2003년에 철거하고 다시 지을 때, 잉글랜드 축구의 아이콘인 바비 무어의 동상을 구장 입구에 세우기로 했다. 또한 동상이 서게 될 구장 입구 이름도 'Bobby Moore Entrance'로 하기로 결정했다. 이 동상은 2007년 구장 재건축 완료와 함께 세상에 공개되었다. 웸블리 구장 안에는 '바비 무어 룸'이라는 이름의 레스토랑도 있다. 잉글랜드 축구계에서 무어를 굉장히 기념비적인 인물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파일:Moorewithhurst.jpg|width=100%]] || 웨스트햄의 전 홈구장인 업튼 파크 근처에도 동상이 있다. 이 동상은 웸블리의 동상과는 다르게 1966년 월드컵 우승 당시 찍힌 사진을 토대로 만든 동상이다. || [[파일:number6retirefromwestham.jpg|width=100%]] ||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FC]]에서 6번을 [[영구결번/스포츠|영구결번]]으로 지정하기 전, 마지막으로 6번을 달았던 선수는 [[매튜 업슨]]이다. 위 사진 왼쪽에 있는 인물은 무어의 두 번째 아내인 스테파니 무어이다. 역대 올타임 베스트 일레븐을 꼽을 때 대개 센터백에 [[프란츠 베켄바워]]는 고정이고, [[프랑코 바레시]], [[엘리아스 피게로아]], [[다니엘 파사레야]], [[가에타노 시레아]] 그리고 바비 무어가 파트너로 경쟁하게 되는데, 그중에서도 무어와 바레시가 서로 가장 치열하게 경쟁하는 선수이다. 보통 클럽 활약과 국가대표팀 활약 중 어느 쪽을 중요하게 보느냐에 따라 갈리는데, 클럽 활약을 중시하는 경우 바레시의 손을 들어 주는 경우가 많고 국가대표팀 활약을 중시하는 경우 무어의 손을 들어 주는 경우가 많다. 가장 최근에 있었던 공신력 있는 매거진의 올타임 베스트 XI 선정 사례로는 2013년 영국 [[월드 사커]]의 올타임 베스트 XI 투표를 들 수 있는데, 무어는 센터백 포지션에서 23표를 받아서 22표를 받은 바레시를 딱 1표 차로 제치고 베켄바워의 파트너로 선정되었다. 이때 베켄바워는 무려 68표를 받았다. 피파 온라인에서는 평가가 박하다. 특히 피파 온라인 4에서의 명성은 고작 유명 선수. [[피파 온라인 4]]에는 레전더리, 월드클래스, 탑클래스까지 유명 선수보다 나은 클래스가 많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유명 선수' 명성이 부여되었다. 평가도 평가이고, 무엇보다 게임 내에서의 성능 자체가 별로 좋지 않다. 이는 피지컬 면에서 상대적으로 약한 바레시나 베켄바워도 마찬가지. 이들의 천재적인 라인 컨트롤이나 경기 템포 조절 등은 게임에서는 구현되기 힘들기 때문이다. 바레시, 베켄바워 같은 경우에는 스피드 면에서는 좋은 능력치를 가지고 있으나 무어의 경우에는 아예 당대에도 발이 느린 것으로 유명했던지라[* 다만 아무래도 너무 느리면 곤란하기 때문인지 중앙 수비수 중에는 평범한 정도의 수치인 60대 중반 정도의 속도를 매겼다.] 스탯이 더 심각한 수준이다. 실제의 바비 무어는 신기에 가까운 예측능력으로 이를 커버했는데, 이를 피파에서 구현할 수는 없으니까. || [[파일:GOAL_Defender.jpg|width=100%]] || 골닷컴에서 시대별 최고의 수비수 5인을 선정했는데, 1960년대 수비수들 중 2위에 이름을 올렸다. [[분류:1941년 출생]][[분류:1993년 사망]][[분류:대장암으로 죽은 인물]][[분류:잉글랜드의 축구선수]][[분류:잉글랜드의 축구감독]][[분류:수비수]][[분류:1958년 데뷔]][[분류:1983년 은퇴]][[분류:바킹 출신 인물]][[분류:웨스트햄 유나이티드 FC/은퇴, 이적]][[분류:풀럼 FC/은퇴, 이적]][[분류:시애틀 사운더스 FC/은퇴, 이적]][[분류:FC 미트윌란/은퇴, 이적]][[분류:옥스퍼드 시티 FC/역대 감독]][[분류:이스턴 SC/역대 감독]][[분류:사우스엔드 유나이티드 FC/역대 감독]][[분류:잉글랜드의 FIFA 월드컵 참가 선수]][[분류:1962 FIFA 월드컵 칠레 참가 선수]][[분류:1966 FIFA 월드컵 잉글랜드 참가 선수]][[분류:1970 FIFA 월드컵 멕시코 참가 선수]][[분류:잉글랜드의 UEFA 유러피언 챔피언십 참가 선수]][[분류:UEFA 유로 1968 참가 선수]][[분류:FIFA 센추리 클럽 가입 선수]][[분류:대영제국 훈장 4등급]][[분류:골키퍼 출장 기록이 있는 필드 플레이어]][[분류:UEFA 주빌리 어워드 수상자]][[분류:FIFA 월드컵 우승 선수]]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